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파울 요제프 괴벨스/생애 (문단 편집) === 승리 === >'''우리는 모든 시대를 통틀어 가장 위대한 정치인으로 역사에 이름을 남길 것이다. 혹은 가장 악랄한 범죄자로.''' > -괴벨스의 일기에서- 선거전을 앞두고 괴벨스는 사고를 터뜨린다. 11월 베를린 시에서 예산 부족으로 시에서 운영하는 운송회사의 임금을 내리는 조치에 노조가 반발하여 파업을 시작하자 '''베를린 돌격대와 공산당이 손을 잡고 동맹파업에 참가한다.''' 히틀러는 웬일로 괴벨스와 오랜 시간 동안 통화한 끝에 '우리가 그렇게 행동하지 않는다면 사회주의도 노동자정당(국가사회주의 독일노동자당)도 아닐 것이다' 라며 지지했다. 돌격대원들과 붉은 전사동맹 깡패들은 나란히 완장을 차고 파업에 참여하지 않는 반동들을 때려잡고 버스와 전차를 때려부쉈다. 돌격대원은 유대인으로 의심되는 승객들까지 두들겨 팼다. 얼마 전까지 유럽 문명의 파괴자요 '''[[모스크바]]발 붉은 역병'''을 절멸시키자던 나치들이 벌인 이런 꼴 사나운 행태에 많은 시민들이 발길을 돌렸으며 주요 언론에서도''' '볼셰비즘이 우파 진영에도 깊이 잠입했다' '''며 깊이 탄식할 지경이었다.[* 이 사건의 배후에는 괴벨스의 노동자 계층의 지지를 얻으려는 속셈도 있었고 그동안 불만이 쌓인 돌격대의 사기를 올려줄 용도도 있었으며, 히틀러가 찬성한 건 정권 협상용 실력행사로 파펜과 슐라이허, 힌덴부르크에 대한 무력시위성이 강했다.] > "이제는 히틀러가 연설을 해도 유세장이 꽉 차지 않았다, 전문가들은 히틀러가 아무리 유세를 다녀도 나치 지지도의 급락을 막지 못하리라 예상했다, 괴벨스도 선거 전날 나치의 패배를 점쳤다" -이언 커쇼 결국 11월 재선거는 말아먹었다. 괴벨스는 노동자 계층에서 지지도가 올랐다며 '몇 천표 정도 잃는 것은 괜찮다'라며 정신승리했지만 실제 선거 결과는 200만 표를 까먹으며 지지도는 33%로 4% 이상 깎이고 의석수도 34석이나 줄었다. 선거가 너무 자주 열리자 질린 탓도 있고 '나치당에게 바이마르 체제를 '절멸'시키라고 표를 줬더니 기존 정치인들과 똑같이 자리다툼이나 한다'라는 실망스런 의견도 많았다. 어쨌든 정권을 코 앞에 두고 나치당은 몰락 위기에 봉착했다. 거듭된 선거로 돈은 빠져나가고 상승세는 꺾이고 정권 탈취는 요원했다. 40만 돌격대를 먹여 살리려면 한 주에 나치당서 250만 마르크씩 빠져나가는데 돈이 없어서 돌격대 대원들이 앵벌이를 하고 다니는 지경이었다. 상황이 이러니 지지자, 당원들, 돌격대 모두가 내린 결론은''' '이제 더 이상의 선거는 안 된다' '''는 것이었다. 이런 위기 상황에서 나치당의 고위 5인 모임이 열린다. 히틀러, 괴링, 괴벨스, 프리크, 슈트라서가 모였다. 그러나 정권 장악에 대해서 이견이 생기는데 나치당 내 의원 원로인 프리크는 '정권에 참여하지 않으면 의회가 또 해산되고 또 한 번 선거해야 되는데 의원들이 자기 의원직이 날아갈까봐 걱정한다'는 현실론을, 슈트라서는 '7월 선거 결과가 좋았는데 가장 유리할 때 참여할 기회를 놓쳤다. 이제라도 정권에 참여해야 한다'라는 유화론을 보인 반면 괴벨스는 여전히 '정권은 정복의 대상이지 협잡질로 발만 담궜다간 반동에 거부감 있는 나치 지지 세력들이 실망할 것이고 국정 책임을 나치가 지게 된다면 지지세도 사그라들 것' 이란 의견을 냈다. 괴링도 괴벨스와 비슷한 입장이었다. 결국 히틀러도 인생 자체가 도박질로 매번 판돈을 올리며 벼락 출세한 인간이라 그런지 역시 다소 불리해진 상황에서도 '[[모 아니면 도]]' 입장을 고수한다. 파펜 내각은 사퇴했지만 힌덴부르크를 조종하여 이번엔 음모가 슐라이허가 '''총리 겸 국방장관 겸 프로이센 경찰청장'''직으로 1932년 12월 2일 취임하여 직접 내각을 운영했다. 그러나 역시 현직 육군 중장 출신 총리는 의회 내에서 지지세력으로 의원 한 명도 없었다. 그나마 파펜은 후겐베르크라도 있었지만 진짜 군인이 일선에 나선 비정상적인 내각은 아무것도 없었다. 역시나 의회 개원하면 또 불신임을 면하기 어려웠다. 음모가 신임 총리 슐라이허 장군은 승부수를 던지는데, 나치당에 지지 요청 훼이크를 보내며 나치 지도부 중 정권에 참여하도록 설득이 가능하다고 판단한 슈트라서와 뜻을 같이 하자고 몰래 제안한다. 슐라이허는 부총리직과 노동부 장관직을 슈트라서에게 제시하면 대략 나치당 의원 중에 60석은 슈트라서를 따라서 나와 자신을 지지해 줄 것으로 예상했지만... 히틀러의 '''격노'''를 슈트라서가 버틸 수가 없었다. 슐라이허의 바람과는 달리 [[그레고어 슈트라서]] 딴에는 자신의 손으로 만들어나간 나치당이 깨지는 것까지는 원치 않았고 히틀러와의 오래된 '주종관계'를 청산하는 대신 몇 년 동안 쌓인 불만들을 적어 히틀러에 보내며 '독일을 한 번 구렁텅이로 몰아넣고 정권을 탈취한다는 발상에는 도저히 찬성할 수가 없다' 라고 소신을 밝힌 뒤 '근본 없이 막돼먹은 놈(괴벨스), 암퇘지([[에른스트 룀]]이 [[동성애자]]란 걸 비꼼), 독일이야 어찌되건 자기 잇속만 채우는 이기주의자([[괴링]])' 들을 성토하고 모든 당직과 의원직을 사퇴한 채 [[이탈리아]]로 훌쩍 떠나버렸는데 이를 '''슈트라서 사태'''라고 한다. 슈트라서 사태가 일어나자 나치당은 내분이 일어나기도 했고, 나치당의 최대의 위기라는 표현까지 나오는 수준이었다, 그러자 히틀러는 당 간부들 앞에서 "만약 당이 깨진다면 나는 3분 안에 죽어버릴 것이다."라면서 자살쇼를 벌였다. 그러자 당 간부들을 깜짝 놀랐고 히틀러 앞에서 당을 분열시키지 않겠다는 약속을 하게 된다, 이 멜로드라마와 같은 행동이 나치당 간부들 사이에서 슈트라서가 불러일으켰을지도 모르는 동요들을 잠재웠고, 그들 모두는 이구동성으로 히틀러에 대한 충성을 다시 한번 맹세하게 되었다.[* 헨리 애슈비 터너 2세가 한 말.] 그렇게 급한 불은 일단 껐지만 상황은 갈수록 나치당에 불리하게 돌아갔고, 나치당이 망하는 것은 시간 문제라는 이야기까지 나올 정도였다. 이러한 시각은 동시대의 영국의 지식인 해럴드 래스키가 한 말에서 잘 드러난다. "만약 나치당이 지금처럼만 간다면, 늙은 히틀러가 바이에른의 시골 촌구석에 처박혀서 저녁이면 저녁마다 맥줏집에서 한때는 내가 독일을 뒤집어엎을 뻔했다라는 이야기를 친구들에게 들려주면서 생을 마감하게 될지도 모른다"고 할 정도였다. 이렇게 나치당의 위기로 몰아넣은 슈트라서에 화가 난 괴벨스는 당 내에 심각한 내분을 일으킨 슈트라서를 그냥 아예 쫒아가서 파묻어 버리자고 히틀러를 충동질하지만 당 내 분란이 알려지길 원치 않던 히틀러는 일단 덮어놓는다.[* 이때 괴벨스, 괴링, 그리고 [[힘러]] 등 나치 실세들에게 미운 털이 단단히 박힌 그레고어 슈트라서는 결국 1934년, [[장검의 밤]] 때 슐라이허 총리 등과 같이 살해당했다. 동생 오토 슈트라서는 해외 탈출에 성공하고 살아남아 전후에 복귀하여 정치 활동을 하나 성공하지는 못한다. 현재 [[네오 나치]]들 노선에 '[[슈트라서주의]]'가 남아있다.] 몇 년 동안 나치 내에서 물고 뜯던 숙적이 몰락하고 나자 괴벨스에게 당 내 방송 업무라는 전리품이 떨어진다.[* 슈트라서가 맡았던 나치당 조직국장은 돌격대, 재정부, 선전부 등 히틀러 직속 조직을 제외한 나머지 모든 업무를 총괄하는 최주요 당직이었다.] 물론 몇 달 후엔 더 큰 선물이 기다리고 있었다. 과거 음모의 대가 슐라이허 총리는 막상 멍석 깔아놓으니 형편없는 솜씨로 쓸데없이 [[그레고어 슈트라서]]를 날려버렸고 인기를 높이고자 찾아간 노동조합, 농민단체, 기업인단체에 돌아가며 볶인 탓에 상충되는 약속을 카드 돌려막기 식으로 일단 지르고 보았다.[* 사회민주당은 '''저질 선동꾼 히틀러 씨'''는 밑천이 드러나서 곧 몰락할 것이기 때문에 과거 독일제국을 쥐고 흔들었던 군부를 등에 업고 권위적 통치를 할 것 같은 슐라이허를 공화국의 가장 큰 적으로 보았다. 공산당도 마찬가지로 나치 폭력배들은 기존 보수세력의 앞잡이에 불과하다는 공산주의 이론에 기반한 교조적 판단을 하고 있었다. 물론 현실은 나치당 득표율이 오르면서 우익 지지율은 모두 잠식당한 상태였다. 중앙당만 온전하고(12%) 후겐베르크의 독일국가인민당마저 리즈 시절(20%)과 1928년 선거(14%)에서 토막이 난 7%의 지지율을 보였으며 나머지 제도권 우익정당들은 거의 나치에 잠식되어 사라졌다. 공화국에 끝까지 우호적이었던 것은 바이마르 후반에 20% 초반지지율에서 정체된 사회민주당이 유일했고 1930년 이후 '대통령내각' 시대와 1932년 두 번의 총선에서 체제절멸, 전복 드립을 치는 나치당과 공산당의 의석수가 과반수를 넘어 모든 정부를 불신임한 탓에 다른 정당의 정치적 의미가 약해지고 있었다.] 노조 쪽에선 역시 사민당이 꽉 잡고 있어서 비협조적이었고 농민단체와 군부 등에는 나치들이 깊숙히 침투해서 슐라이허가 뻘짓하는 것을 손바닥 보듯 다 알고 있었으며 나치당이 일부러 더 들볶으라고 주문하기도 했다. 한편 부르주아 신문에서는 이미 마무리된 '반란' 사건을 두고 나치당이 내분이 일어났다고 뒤늦게야 뒷북이나 치고 있었다. 슐라이허가 한때 친구인 파펜이 나치와 접촉하며 자신을 구원한다고 착각하는 사이 슐라이허의 획책에 총리직을 잃었기 때문에 앙심을 품은 파펜과 나치당의 사이는 점점 가까워져서 힌덴부르크는 히틀러 총리, 파펜 부총리라는 안에 합의를 해버렸고, 결국 바이마르의 마지막 내각인 슐라이허 내각은 취임 57일만에 날아갔다.[* 슐라이허는 프랑스 대사 퐁셰 앞에서 회고하길 '더 이상 독일인의 충성심을 믿지 않는다' 며 '총리직에 있는 57일동안 57번의 배신을 당했다'고 울분을 토한다. 의회 지지 세력도 없고 오로지 군부의 지지만 앞세워서 통치하려고 했던 발상부터가 비현실적이었다. 나치가 정권을 잡는 걸 가장 늦춘 요인은 오히려 천박한 보헤미안 상병에게 총리직을 주는 게 꺼림칙했던 힌덴부르크였다(힌덴부르크 대통령은 '보헤미안 상병'을 총리로 임명하는 게 헌법에 대한 맹세와 본인의 양심상 도저히 할 수 없는 일이라고 일갈한 적도 있다). 결국 막상 군부도 슐라이허의 편이 아니었던 것이다.] 기타 자세한 권력 내막은 [[프란츠 폰 파펜]], [[파울 폰 힌덴부르크]] 문서 참조. 결국 '''1933년 1월 30일, 나치 정권이 탄생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